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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FIH와 보다
약의 기원
마취제는 언제, 어떻게 나왔을까?
외과수술의 혁명, 마취제
공포와 비명으로 얼룩졌던 살벌한 수술실이 고요한 정적이 흐르는 방으로 변신했다. 19세기 최고의 발명품은 끔찍한 수술의 두려움을 획기적으로 줄여준 마취제라고 할 수 있다. 이 약이 나오면서 외과수술이 급속도로 발전하게 되었고 환자는 안도의 숨을 들이마시며 수술대에 오르게 되었다.

- 글. 정승규 약사(<인류를 구한 12가지 약 이야기> 저자)
수술의 고통
마취제가 나오기 전 수술을 받기 위해선 목숨을 걸어야 했다. “외과수술을 받느니 자살하는 게 낫다”라는 항간의 말은 진실이었다. 당시 외과수술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사용한 것이 술과 아편이었다. 환자에게 술을 잔뜩 마시게 한 다음 인사불성으로 만들어 고통을 줄이는 것이다. 아편을 쓰기도 했는데 몽롱한 상태에서 의식을 잃게 했다.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 이후에는 얼음이 도입되었다. 퇴각하면서 추운 겨울 러시아에서 한 수술이 통증의 감각을 떨어뜨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 가지 모두 그렇게 만족스럽지 못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마지못해 사용한 방법이어서 한계가 있었다. 1839년 프랑스 외과 의사 루이스 벨푸는 “수술에서 통증을 없애는 것은 허락되지 않은 망상에 불과하다”라고 한탄했다. 하지만 몇 년 후 미국에서 발견된 웃음 가스(아산화질소)의 효과에 의해 이런 말은 사라지고 말았다.

최초의 마취제, 웃음 가스
1775년 영국에서 합성된 웃음 가스를 들이마시면 날아갈 듯한 기분이 들고 의식이 사라졌다. 마취제로 사용될 수 있다는 주장이 있었지만, 오랫동안 실험해 보는 사람은 없었다. 대신 파티에 사용되었다. 한동안 웃음 가스를 사용해 웃게 만들고 유쾌한 소동을 벌이는 놀이가 유행했다. 1844년 미국 동부 코네티컷주의 하트퍼드에서 웃음 가스쇼가 열렸다. 관객 중에 자원자를 받아 웃음 가스를 마시게 한 뒤 바보처럼 연출하는 공연이었다.

웃음 가스를 마신 한 사람은 갑자기 즐거워하더니 정신없이 관중 사이를 뛰어다녔다. 그러다가 의자에 부딪혀 다리에 피가 나는데도 상처가 난 것을 몰랐다. 그때 치과의사 호레이스 웰스가 그 광경을 보고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효과를 이를 뽑는 데 사용해 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 날 웃음 가스를 들이마신 후 다른 치과의사에게 자신의 사랑니를 뽑으라고 시켰다. 신기하게도 통증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공개 수술에 성공한 에테르
웃음 가스에 자극받은 또 다른 치과의사 윌리엄 모튼에 의해 에테르도 마취 작용이 있다는 사실이 발견되었다. 에테르는 알코올(에탄올)의 가수분해로 쉽게 만들 수 있다. 1846년 10월 16일 미국 매사추세츠 일반 병원에서 목에 종양이 있는 환자의 공개 수술이 시행되었다. 모튼이 에테르로 마취하고 외과 의사가 집도했다. 수술은 대성공이었다.

마취에서 깨어난 환자는 “이것은 사기가 아니다”라고 외쳤다. 최초로 고통 없는 수술을 확인한 사람들은 에테르의 마취 효능에 깜짝 놀랐다. 이날은 ‘에테르의 날’이라고 불리게 되었고 과학이 고통을 조절하게 된 특별한 날이었다. 이후 클로로폼, 할로탄, 세보플루란 등이 개발되면서 마취제는 우리 생활에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약이 되었다.

외과수술의 필수품
외과수술에서 마취제는 필수적이다. 2020년 한 해 우리나라에서 195만 건의 수술이 있었다. 마취약이 개발되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많은 수술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백내장, 일반 척추, 치핵 순으로 수술을 많이 한다. 통증을 느끼지 못하게 만드는 마취약은 의학의 발전을 크게 앞당겼다. 고통에 대한 두려움은 인간의 본능에 가깝다. 주사 맞는 잠깐의 순간도 두려운데 배를 가르고 내장을 자르는 고통은 마취 없이는 할 수 없다. 마취제 개발 이전과 이후의 수술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마취제 덕으로 공포로 가득했던 수술실이 침묵의 장소로 탈바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