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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구석3열

‘연이율 19.8%’ 건강을 위해
구입하시겠습니까?
언제부턴가 ‘건강한 삶’에도 경제력이라는 전제가 붙기 시작했다.
‘돈 없어도 돼, 건강한 게 최고야’라는 말을 부정하고 싶진 않지만,
‘건강하려면 돈이 있어야 한다’는 말 역시 부정하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그래서일까. 허무맹랑한 이야기라고 생각하며 보기 시작했으나, 끝날 때쯤엔 어딘지 모르게 씁쓸했던 영화 <리포 맨>이었다.

- 글. 전종보 기자(헬스조선)
최고의 인공장기 회수꾼, 가슴에 인공심장을 품다
‘리포 맨(Repo Men)’은 영화 속 주인공 레미(주드 로 役)의 직업이다. 단어에서 알 수 있듯 그는 무언가를 ‘회수(Repo)’하는 일을 하고 있다. 레미가 회수하는 것은 체납된 돈이나 물건이 아니다. 사람 몸속에 있는 ‘인공장기’다. 영화는 먼 훗날 인공장기를 대량 생산할 수 있게 돼, 아픈 사람들이 자신에게 필요한 모든 인공장기를 구입·사용할 수 있는 세상을 배경으로 한다. 영화 속 인공장기의 가격은 하나당 수억 원에 이른다. 인공장기 회사 ‘유니언’은 단순히 인공장기를 비싸게 파는 것을 넘어 ‘연이율 19.8%’라는 높은 이자까지 책정해 받아낸다.

엄청난 부자가 아니라면 감당하기 힘든 가격과 이자지만 회사는 그럴듯한 말로 포장해 사람들에게 인공장기를 판매한다. 인공장기 값과 이자를 제때 지불하지 못한 사람들은 체납자 신세가 되고, 그들의 앞에는 어김없이 리포 맨이 등장한다. 리포 맨은 물건을 되찾아오듯,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체납자의 배를 열어 인공장기를 회수한다. 리포 맨으로서 높은 평가를 받아온 레미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는 특정 사건을 계기로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된다. 의지와 상관없이 왼쪽 가슴에 인공심장을 품게 된 그날부터다.

사람을 살리는 건 의술일까, 돈일까
인공장기를 구입한 사람들이 살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 ‘돈’이다. 수억 원, 수십억 원에 달하는 인공장기 가격과 높은 이자를 감당할 수 있다면 리포 맨으로부터 인공장기도 목숨도 빼앗기지 않는다. 문제는 그런 사람이 극소수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람들의 생명을 위협하는 건 ‘리포 맨’이 아닌 ‘돈’일지도 모른다. 조금 더 생각해보면 현실에서도 비슷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인공장기를 고가의 치료제, 또는 수술이라고 생각해보자. 의료 보험제도가 개선되고 과거보다 국가 지원도 늘었으나, 여전히 수많은 환자가 비용 부담으로 인해 치료를 포기하는 것이 현실이다.

멀리 갈 것 없이 항암제 ‘킴리아’의 사례가 있다. 킴리아는 1회 투여만으로 기존 치료제 효과를 보지 못했던 혈액암 환자를 치료해 ‘꿈의 항암제’로 불리는 약이다. 그러나 1회 투여 비용이 4~5억 원에 달해 실제로 킴리아를 투여 받는 것은 쉽지 않았다. 다행히 올해 4월부터 보험 적용이 됐지만, 그 전까지 환자 커뮤니티나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 등에는 ‘환자들을 살려달라’며 보험 적용을 호소하는 목소리들이 끊이지 않았다.

사실상 환자를 살릴 수 있는 마지막 수단임에도, 치료비 감당이 안 돼 실제 치료 혜택을 받은 환자는 많지 않았던 셈이다. 물론 치료제 개발사가 영화 속 유니언처럼 환자를 속이거나 높은 이율을 적용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단 한 번의 주사 치료를 위해 수억 원의 비용이 필요했던 혈액암 환자들과 살기 위해 수억 원에 달하는 인공장기 가격을 지불해야 했던 영화 속 등장인물들의 모습은 씁쓸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닮아있다.

건강불평등 문제, 국가가 나서야 하는 이유
이 영화에서 국가는 철저히 배제됐다. 인공장기를 생산·판매하는 회사가 절대적인 힘을 갖고 있을 뿐, 국가가 회사의 인공장기 사업을 규제하거나 환자들의 치료비를 지원하는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경제력이 뒷받침되는 사람들은 회사로부터 인공장기를 구매해 생명을 이어가고, 반대로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값을 지불하거나 이자를 납부하지 못해 목숨을 잃는다. 이런 점에서 영화는 국가가 개인 간 경제력 차이에서 발생하는 건강불평등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을 때 나타날 수 있는 현상을 극단적 예시를 통해 보여줬다고 생각된다.

먼 훗날 의료기술이 더 발달하고 해당 기술의 소유권을가진 기업들이 이를 이용해 생명을 상품화한다면 영화와 비슷한 일들이 벌어지지 말란 법도 없다. 예컨대 리포 맨처럼 사람들의 배를 가르고 인공장기를 꺼내 가진 않아도, 특정 치료제·의료기술을 손에 쥔 회사가 이를 이용해 인간의 생명을 좌우할 수는 있다는 이야기다.

실제 코로나19 백신·치료제 개발 과정에서 이 같은 문제들이 수면 위로 떠올랐으며, 앞으로 비슷한 문제가 반복될 것으로 보는 전문가들도 적지 않다. 이미 기술 발전 속도가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선 지금, 소득·직업·지역 등에 따른 건강불평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국가가 보다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