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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란만장했던 이종욱 전 WHO 사무총장의 삶

    한센병·소아마비
    퇴치에 진력한
    ‘백신의 황제’

    • 글_ 엄상현 동아일보 기자
  • 코로나19 팬데믹이 지구촌을 공포로 몰아넣은 지 2년이 다 돼 간다. 이 끔찍한 재앙은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국제 질병관리 컨트롤타워인 세계보건기구(WHO)는 대체 뭘 하는 것일까. 국제사회는 그 역할과 효용성에 깊은 회의와 의문을 제기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그리고 15년 전 타계한 이종욱 전 WHO 사무총장(2003년 7월~2006년 5월 재임)이 다시 소환됐다. 과연 그가 살아있다면 어땠을까?
대한민국 최초의 국제기구 수장

WHO 제6대 사무총장 이종욱. 대한민국 최초의 국제기구 수장이지만, 안타깝게도 우리나라보다는 오히려 국제사회에서 더 유명하고 높이 평가받는다. 코로나19가 발생하자마자 전 세계에서 가장 긴박하게 움직인 곳, 바로 WHO 제네바 본부 내 감염병 대응 핵심시설인 전략보건운영센터(SHOC, 일명 쇼크룸)를 만든 주인공이 바로 그다. 센터 이름 앞에 그의 영문 이니셜 ‘JW LEE’가 붙은 이유다.
인간 이종욱의 인생은 파란만장, 그 자체였다. 1945년 광복을 4개월쯤 앞둔 4월 12일 서울 북아현동의 한 한옥에서 4남 2녀 중 넷째로 태어난 그는 불과 다섯 살의 나이에 6·25전쟁을 겪어야 했다. 1950년 그 추운 겨울, 서울에서 청주를 거쳐 대구까지 이어진 기나긴 피난길과 전쟁 중 겪어야 했던 고달픈 피난생활은 그의 어린 시절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다행히 일제강점기 경성부(광복 이후 서울시) 하급 공무원으로 시작해 마포구청장과 서대문구청장, 종로구청장 등 서울시 주요 구청장 자리에까지 오른 아버지 덕분에 그 시절 집안 살림은 여유로웠다. 종욱 역시 명문으로 손꼽히는 경복중학교에 이어 경복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부모의 기대에 부응했고, 친구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높았다. 작은 키에 체구도 왜소했지만 남다른 친화력과 리더십으로 고교 3년 내내 반장을 도맡아 할 정도였다.
불행은 예고 없이 찾아왔다. 1960년 이승만 정권의 3·15부정선거로 촉발된 4·19혁명의 거센 격랑에 휘말려 공직에서 물러난 아버지가 그해 8월 후두암으로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극심한 스트레스와 오랜 흡연이 원인이었다.
이후 집안 살림은 급속도로 어려워졌다. 어머니는 자녀들의 학비를 마련하고 생활비를 줄이기 위해 청파동의 커다란 집을 팔고 작은 집으로 이사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엔 홍제동 문화촌으로 옮겼다가 다음엔 불광동, 녹번동, 수색동, 진관동 등 점점 더 싼 집을 찾아 시 외곽으로 밀려나야 했다.
종욱은 이 시기 겪었던 충격과 좌절 때문인지 대학입시에 번번이 실패했다. 당초 그가 가고자 했던 목표는 서울대 공대였지만 전국에서 가장 높았던 경쟁률을 뚫기가 쉽지 않았다. 결국 군 복무를 마친 후인 1970년 입시에서 5수 끝에 서울대 의대에 합격할 수 있었다. 동기들보다 일곱 살이나 많은 나이였다. 그가 의대를 선택한 건 6·25전쟁 때 북한군이 의사는 죽이지 않는 것을 본 어머니의 권유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다.
늦은 나이에 대학에 진학한 종욱은 대학시절 내내 미국 유학을 준비했다. 계획대로 그가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면 어쩌면 미국에서 평범한 한인 의사 중 한 명으로 살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경기 의왕시 한센인 요양기관인 ‘라자로 마을’에 자원봉사를 갔다가 한 일본인 여성을 운명처럼 만나면서 인생의 커다란 변곡점을 맞는다. 일본 도쿄 소피아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수녀를 꿈꾸다 4년 전부터 이 마을에서 자원봉사를 하던 가부라키 레이코 여사다.
한일 관계가 극도로 악화됐던 시절에 하필 왜 일본 여성이었을까. 주변의 거센 반대에도 불구하고 종욱은 결국 레이코 여사를 평생의 반려자로 선택했고, 이후 예상치 못한 숱한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WHO를 방문한 스페인 국왕 후안 카를로스 부부와 이종욱 사무총장.
남다른 친화력으로 전 세계 지도자들과 깊은 유대감 형성

두 사람 사이에 자녀가 생기자 당장 국적 문제부터 걸림돌로 작용했다. 레이코 여사가 한국에서 배우자 비자를 취득하지 못하면서 가족 모두가 한국과 일본, 어느 곳에서도 온전히 함께 살 수 없게 된 것이다. 강원도립의료원(현 강원대병원) 응급실 의사로 일하던 종욱은 결국 한 미국인 의사 부부의 도움을 받아 1979년 미국령인 하와이로 떠나야 했다.
그곳에서 그는 하와이대 공중보건학 석사과정을 밟으면서 라자로 마을 자원봉사 시절 처음 접했던 한센병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에 참여했다. 이후 1981년 6월 남태평양의 외딴 섬인 아메리칸사모아 린든 B. 존슨 병원 응급실 임상의를 거쳐 1983년 6월 피지 수바의 WHO 남태평양지역사무소 한센병 자문관으로 부임하면서 국제 공중보건의료계의 길로 들어섰다. 하와이대 연구원이나 미국 내 병원 임상의 등 보다 안정적이고 편안한 길이 있었는데도, 남태평양 오지를 전전하며 한센병 환자들을 치료하고 예방법을 찾아내는 힘겨운 길을 선택했던 것이다.
종욱은 남태평양지역 내 한센병 환자 치료와 퇴치를 위해 1년에 보통 4개월, 많게는 6개월 가까이 출장을 다녔다. 덕분에 남태평양지역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한센병 유병률을 ‘인구 1만 명당 1건 이하’로 낮추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 성과를 인정받아 필리핀 마닐라의 서태평양지역사무처의 ‘만성질환 지역고문’을 거쳐 질병관리국장에 오른 그는 이번엔 소아마비 퇴치에 주력했다. 그가 주목한 것은 백신이었다. 선진국에만 주로 사용하던 백신을 개발도상국으로 확대 보급하면서 소아마비 바이러스 퇴치에 큰 효과를 본 것. 그 성과는 그를 다시 WHO 제네바 본부의 국제 백신·면역 프로그램 및 어린이 백신사업 총괄국장에까지 오르게 했다. 그 자리는 ‘백신의 황제’라는 칭호가 붙여질 정도로 절대적인 권력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보여준 모습은 그런 칭호와는 거리가 멀었다. 지위 고하를 떠나 모든 사람들과 격의 없이 소통하면서 항상 웃는 모습에 위트와 열정이 넘쳐났다. 중요한 자리에는 적절한 사람을 찾아 전권을 맡기고 꼭 필요한 때에만 관여했다. 그러면서도 일 처리는 맺고 끊는 게 분명했다.
이런 리더십 덕분에 WHO 본부 차원에서 확대해나간 소아마비 퇴치 프로그램이 개발도상국을 중심으로 큰 성과를 거뒀다. 1~3형 소아마비 바이러스 중 2형은 1999년에 박멸됐고, 3형은 2012년 11월 마지막으로 보고된 이후 사라졌다. 1형은 오랜 내전으로 백신 접종이 어려운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 단 두 개 국가에서만 주로 발견돼 지구촌에서 소아마비 바이러스 종식 선언이 얼마 남지 않았다.
2003년 1월, WHO 최고 책임자인 사무총장에 오른 이후 그가 보여준 모습도 전 세계 지도자들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했다. 2005년 말까지 300만 명의 에이즈 환자에게 치료제를 보급하겠다는 ‘3 by 5’ 캠페인을 통해 버려지고 외면당했던 수백 수천만 명의 개발도상국 환자들에게 희망을 줬고, 주변의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전략보건운영센터 설립을 강행해 사상 최악의 바이러스 대유행 출현을 사전에 대비하도록 했다.
특히 그의 남다른 친화력은 전 세계의 지도자들과 깊은 유대감을 형성했고, 국제 공중보건 및 질병관리 컨트롤타워로서 WHO의 위상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만약 그가 아직 살아있다면 코로나19 팬데믹에 WHO가 지금보다는 좀 더 나은 대처를 하지 않았을까. 그랬다면 이 끔찍한 재앙도 이미 끝났을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