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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FIH 문화생활
지구촌을 밝히는 ‘한국인 슈바이처’
  • 글로벌케어 박세업 본부장,
    꿈을 향한 용기를 말하다

    • 글_ 김보미
  • 치열한 경쟁 속에서 효과와 효능만을 강조하는 시대에 나보다 우리, 안정보다 열정을 추구하는 이가 있다. 오로지 해외 의료봉사의 꿈을 위해 전쟁 중인 아프가니스탄에 발을 내디딘 것을 시작으로 15년째 외과 전문의이자 국제보건 전문가로서 활발한 활동을 이어온 글로벌케어 박세업 북아프리카 본부장. 꿈을 위해 기꺼이 험지로 나섰던, 용기 가득한 그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글로벌케어 박세업 본부장(왼쪽에서 두번째)과 가족.
꿈을 위해 험난한 땅 위에 서다

2005년 아프가니스탄. 자살테러와 탈레반의 미사일 공격이 지속적으로 일어나고, 전투기 이륙 소리와 로켓 폭음이 끊이지 않는 그곳으로 부인, 어린 두 아들과 함께 떠난 의사가 있었다. 이유는 단 하나, 오랫동안 품어온 꿈을 더 이상 미뤄둘 수 없었기 때문이다. 불혹의 나이에 가족과 함께 험지로 뛰어들 정도로 포기할 수 없었던 꿈은 무엇이었을까.
그 꿈은 인턴 시절, 이라크 내전으로 말미암은 쿠르드 난민 뉴스를 접했을 때 마음속 작은 씨앗으로 자리 잡았다. 당시 군 미필 상태라 떠날 수 없었지만 ‘언젠가 꼭 해외 의료봉사를 떠나겠다’는 다짐은 졸업 후 경남 마산에 개인의원을 열고 안정적인 삶을 살아가는 동안에도 끊임없이 싹을 틔웠다.
1995년부터 의료 접근성이 떨어지는 시골지역을 매월 방문해 의료봉사를 진행하고, 1998년 베트남을 시작으로 몽골, 중국, 아제르바이잔 등 5년간 7번의 해외 의료봉사에서 다양한 진료와 수술을 집도하면서 꿈에 대한 갈증을 해소해오던 그에게 한 사건이 와 닿았다. 2001년 9·11테러로 발발한 아프가니스탄 전쟁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제대로 된 의료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뉴스가 그의 마음을 두드린 것.
“연로한 아버님에 대한 걱정과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함이 있었지만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을 실천하는 것이 의료인으로서 걸어가야 할 길이라는 확신이 있었다”는 글로벌케어 박세업 북아프리카 본부장. 올해 1월 제9회 이태석봉사상을 수상하기까지 그의 여정엔 어떤 특별한 이야기들이 놓여 있을까. 다시 이야기의 시작, 2005년 아프가니스탄으로 돌아가보자.
당시 아프가니스탄의 상황은 매우 열악했다. 물 공급이 원활하지 않아 집집마다 지하수를 파야 했고, 전기는 일주일에 12시간 정도만 공급돼 전자제품은 거의 사용할 수 없었다. 국제기구와 많은 비정부기구(NGO)들이 병원을 세우고 의료지원 활동을 펼쳤지만, 그럼에도 제대로 된 의료인, 약품 그리고 기본 의료시설은 항상 부족했다. 자연스럽게 그는 여러 가지 역할을 수행하게 됐다. NGO병원인 큐어국제병원 외과 전문의로서 화상 치료를 진행하면서 아프가니스탄 현지 의사의 역량 강화를 위해 그들에게 암 수술에 대해 가르쳤다.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처음으로 복강경 수술을 시도하면서 외과 펠로우 훈련 프로그램을 진행하기도 했는데, 당시 그의 제자였던 닥터 카말이 현재 아프가니스탄에서 가장 뛰어난 복강경 전문의로 활동하고 있다고.
2007년엔 바그람 미군부대 내 한국병원 병원장으로 일하면서 같은 부대 내에 있는 미군병원, 이집트병원과 협력해 지역 재건의 일환으로 현지인 진료 및 인턴십 훈련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이때 병원에 있었던 의료인들은 한국에서 연수를 받고 본국으로 돌아가 영향력 있는 전문의가 됐는데, 누리소통망(SNS)을 통해 꼭 다시 함께 일하자고 그리움의 인사를 전해와 그의 마음을 뭉클하게 하기도 했다.

아프가니스탄 현지에서의 화상 환자 수술.
보건 전문가로서 새로운 꿈을 펼치다

아프가니스탄의 열악한 의료 환경 속에서 한 명이라도 살리고자 부단히 노력했지만, 그는 보이지 않는 벽에 직면했다. 병원 안에서 아무리 열심히 환자를 치료해도 절대 빈곤과 낮은 의료 접근성 때문에 병원 밖에선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받는 현실을 마주하게 된 것. 이 벽을 뛰어넘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질적으로 높은 의료 혜택을 줄 수 없을까 고민하던 차에, 함께 일하던 동료를 통해 이런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분야가 ‘국제보건’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그는 그 길로 50세의 젊지 않은 나이에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존스홉킨스대 국제보건 석사과정의 경험은 그의 삶을 또 새로운 곳으로 데려다놓았다.
공부를 끝내고 현장으로 돌아온 2012년부터 그는 보건 전문가로서 건강한 보건체계를 세우는 데 힘쓰고 있다. 에티오피아에서 월드비전과 위드의 영양보건사업, PD/Hearth 프로그램의 성공에 대한 사회보건적 요소를 연구하는 팀에 몸담기도 하고, 가나에선 한국국제협력단(KOICA)이 미국국제개발처(USAID)와 협력하고 있는 모자보건사업의 형성조사팀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모로코 결핵환자 방문 교육.
함께, 우직하게 한길을 걸어가다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1997년 시작된 한국의 의료전문 NGO인 글로벌케어 북아프리카 본부장으로 지역사회 중심의 보건사업을 진행하면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보건 전문가로서 국가 보건사업의 형성조사, 보건대학원과의 협력을 통한 연구, 그리고 보건정책에 대한 자문 역할도 하고 있다. 특히 이번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한국의 대응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세계보건기구(WHO) 지역사무실과 질병본부 그리고 모로코 현지 보건의료인들에게 코로나19의 진단, 추적, 치료에 대한 한국의 경험을 나누는 일을 하고 있다고.
다른 문화 속에서 이타적인 삶을 살아가는 데에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 따랐다. 외국에서의 식생활 변화로 언제부턴가 통풍이 생겼고, 설상가상으로 척추협착증까지 더해져 2년 전엔 허리 수술을 받기도 했다.
무엇보다 마음에 걸리는 것은 한국에 홀로 계시는 연로한 아버님. “상당히 긴 시간을 해외에서 봉사하며 살았으니 이제는 귀국해 아버님을 모셔야 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들 때도 있었어요.”
특히 코로나19 사태로 모로코에서 확진자가 계속 늘어가는 상황에서 한국으로부터 4번의 특별기가 왔다 가면서 바로 날아갈 기회가 있었지만, 차마 그는 한국행 비행기에 오를 수 없었다. 모로코에 있는 한인들과 현재 진행 중인 결핵사업을 통해 매일 만나는 현지인들이 마음에 걸렸기 때문. “지난 8월 8일 작은 아들이 한국에서 결혼식을 올렸어요. 하지만 자녀들과 며느리에게 우리의 상황을 설명하고 결혼식은 화상(Zoom)으로 참석했죠. 그리고 이렇게 아직까지 현장에 남아 있습니다.”
어떻게 그토록 우직하게 한길을 걸을 수 있었을까. 힘들 때마다 그의 곁을 지켜준 동반자의 무한한 응원 덕분 아니었을까. 결혼 전부터 항상 같은 마음이었던 그의 부인 역시 나란히 봉사의 길을 걸어왔다. 카불에선 굿네이버스 여성센터에서 여성들의 풍성한 삶을 위한 직업훈련에 참가하고, 바그람 한국병원에선 의료행정요원으로 활동하면서 함께 봉사를 실천해온 것. 현재는 모로코의 마루문화센터에서 문화교류 활동과 바느질, 미용 등 여성을 위한 다양한 직업훈련을 담당하고 있다.
“해외 의료봉사는 결코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라고 강조하는 박세업 본부장. 지금까지 쉼 없이 달려온 길, 그 길 위에서 함께해준 사람들의 도움과 위로, 격려가 없었다면 어떤 것도 가능하지 않았다고.
건강이 허락할 때까지 지금처럼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돕고 섬기는 의료인으로서 살아가고 싶다는 그는 자신이 그랬듯, 해외 의료봉사를 꿈꾸는 청년들에게도 따뜻한 조언을 남겼다. “세계는 넓고, 보건 분야는 우리 생각보다 훨씬 넓습니다. 1974년 알마아타 선언에서 선포됐던 ‘health for all’의 꿈을 가져보시기를 권합니다”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