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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FIH 문화생활
지구촌을 밝히는 ‘한국인 슈바이처’
  • 최마지아 수녀, 작은 희망이
    위대한 생의 시작이 되다

    • 글_ 김보미
  • 2010년 지진 피해로 폐허가 된 아이티에 희망을 쌓아올린 마을이 있다. ‘꽃동네(KKOTTONGNAE)’라는 한글 이름을 단 이 마을에서 수녀이자 간호사로서 병들고 지친 이웃을 보듬어온 최마지아 수녀. 그의 이야기엔 작지만 결코 사소하지 않은 희망에서 앞으로 나아갈 생명력을 읽어내는 힘이 깃들어 있다.
아이티에서 희망을 꽃피우는 꽃동네

대지진으로부터 2년 후인 2012년, 절망에 휩싸인 아이티에 한국의 꽃동네가 들어섰다. 집과 가족을 잃고 병든 노인들을 돌보기 위해 중남미 구호단체 FFTP(Food for the Poor)가 지원하고 한국의 (재)예수의 꽃동네유지재단이 운영하는 공동체가 세워진 것. 약 4000평의 땅에 325채의 작은 집들이 들어선 이곳에서 5명의 수도자와 50여 명의 직원이 노인과 아이, 장애인 등 320명의 가족을 돌보고 있다.
최마지아 수녀는 이 마을의 전체 살림을 책임지는 원장 수녀이자 가족들의 생명을 살뜰히 돌보는 간호사다. 국군간호사관학교 30기, 간호장교 대위로 제대하고 미국 조지아주립대학교에서 간호대학원 석사과정을 마친 의료인으로서 월요일과 목요일 주 2회 진료를 보고 엑스레이 기사 역할도 수행한다. 외부 협조 업무까지 1인 다역을 도맡아 하는 최마지아 수녀는 “저뿐만 아니라 모두가 일당백의 역할을 하니까 이 큰 꽃동네가 알차게 운영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사목 외에도 입·퇴소 관리, 매월 회지 발송, 목공일까지 해내는 정타데오 수사신부, 10세 미만의 장애 아이들을 돌보고 주방을 담당하면서 회지 디자인까지 일임하는 임야고보 수녀, 남자 가족들을 돌보면서 꽃동네의 시설 보수를 맡아서 하는 박요한 수사, 여자 가족들을 돌보고 회계를 담당하며 꽃동네 찬미단을 이끄는 이시몬 수녀까지…. 아이티 꽃동네 수도자들은 빈틈없는 하루로 촘촘하게 평온한 미래를 일궈가고 있다.
이들이 돌보는 꽃동네 가족들은 가족이나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병원 주차장 뒤편에서 안구 종양으로 죽어가던 사람, 쓰레기장 바닥에 쓰러져 있던 사람, 옛 소아 응급실 건물에서 1년가량 버려진 채 살아가던 4명의 장애아 등 생과 사의 갈림길에 서 있던 사람들. 이들을 돌보기 위해 아이티 꽃동네는 기본적으로 소변검사 스틱, 혈당 체크기와 이동식 엑스레이를 갖추고 있고, 산소 생성기, 심전도 모니터링, 의료용 흡입기(석션기)와 분무기(네뷸라이저) 등의 의료 장비들도 갖춰 중환자도 돌볼 수 있다.
“아이티에서 의료 선교 중이신 내과 의사 하 선생님께서 정기적 왕진도 와주시고 아이티 정신과·소아과 의사 선생님, 한국에 계신 피부과 김 선생님이 큰 도움을 주고 계십니다.” 덕분에 수많은 이들이 건강과 자신을 되찾을 수 있었다고.

세상에서 가장 부러운 부자

문을 연 지 8년, 아이티 꽃동네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중환자동, 정신 폐쇄병동, 10세 미만의 아동들이 머무는 천사의 집, 닭장, 목공소, 매점, 소성당 등을 새롭게 갖췄고, 가족 구성도 크게 달라졌다. 노인 200여 명이었던 가족은 점점 늘어나 지금은 갓 태어난 아기부터 100세 노인까지 다양한 세대를 아울러 320명에 달한다고. 그들 중 건강을 회복한 사람들은 자신보다 더 아픈 사람을 도와주는 도우미로 거듭나기도 했다. 마을 일을 구석구석 챙기고 누군가 병원에 입원하면 간병에 나서는 그들이 최마지아 수녀는 그저 고맙다. 아이티 현지 직원들의 의식도 처음과는 많이 달라졌다. 꽃동네 정신을 체득해 거리에 버려진 이웃을 만나면 데려오고, 가끔 쌀이나 콩을 나눠주면 이웃과 나눴다는 얘기도 전해준다고.
오늘날의 꽃동네가 있기까지 많은 도움의 손길도 있었다. 한국과 미국에 있는 봉사자들은 식료품과 의료물품을 아낌없이 보내주는 것은 물론, 직접 아이티까지 날아와 일손을 보탰다. 무더운 날씨에 잠도 제대로 못 자면서 때가 되면 음식과 약품을 잔뜩 챙겨오는 마취과 의사 부부도 있다. “산타 할아버지도 그렇게는 못 가져오실 거예요. 이분은 꽃동네 안에 수술실을 만드는 것이 꿈이세요. 저도 함께 그 꿈을 꾸고 있고요. 저희 참 부자지요?”라는 최마지아 수녀의 말, 정말이었다.
그는 ‘인연’ 부자이기도 하다. 수많은 이를 보듬으면서 다양한 기쁨을 느끼고 때론 그들로부터 배우기도 했다. 그중에서도 청년 오뎅은 그가 경험한 기적 중 하나다. 국립병원 병실 한구석에 8일 이상 방치된 채 죽어가던 오뎅을 보다 못한 옆 환자 보호자들의 청으로 데려오게 됐는데, 그는 머리 곳곳에 깊은 열상을 입고 간질병, 정신병까지 앓고 있어 병세가 심각해 보였다. 그런데 차츰 회복해 걷기 시작하더니 지금은 완전히 건강해져 매일 봉사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20대 후반의 여성 조안도 꽃동네에서 새로운 삶을 찾게 된 주인공. 나체로 4차로 도로 중앙을 걷다가 최마지아 수녀를 만난 그는 타인의 얼굴에 침을 뱉고 발로 차는 등 폭력적이었다. 다행히 3~4개월 후 안정을 되찾았고, 2년 후 고등교육을 받은 그녀에게 최마지아 수녀는 꽃동네 안의 작은 매점을 운영할 기회를 주었다. 다시 1년이 지난 지금 조안은 선생님, 최마지아 수녀는 학생이 되어 함께 불어 공부를 하고 있다.

수녀와 간호사, 모든 것이 감사한 순간

최마지아 수녀가 비추는 희망의 빛은 아이티 꽃동네 밖까지 닿았다. 3년 동안 매월 만나팩(Mannapack Rice, 쌀과 프로테인 가루가 든 아프리카 기아 아동을 위해 만든 봉지 쌀) 150박스와 의류, 신발 등을 쓰레기장에서 기거하는 빈민 350여 명과 나눈 것. 처음에는 몇 봉지 안 되는 쌀이 얼마나 도움이 될까 하는 회의감도 들었지만, 만약 이 팩 한 봉지로 누군가 아침을 먹을 수 있다는 희망으로 하루를 보낸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수녀이자 간호사로 봉사의 삶을 살아온 그이지만, 처음부터 이런 삶을 계획했던 것은 아니다. 간호장교 의무 복무 7년을 마치고 제대 후에는 간호사 대우가 좋은 미국행을 계획했다. 몇 가지 서류 작업을 기다리는 동안 꽃동네 병원에서 잠시 머무르며 일하기로 했는데, 이것이 3년 반으로 길어졌고 이 시간이 그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는 전환점이 됐다. 지금도 그 선택에 후회는 없다고.
아이티가 아니면 경험할 수 없었던 위험한 사건들마저 그녀에게는 감사한 일이었다. 만나팩을 트럭에 싣고 가다가 동네 건달들이 달리는 차에 올라타 도둑질할 때도, 과격한 시위로 흉흉해진 거리에서 달려드는 군중을 피해 달릴 때도 언제나 그의 마음에는 감사함이 있었다. 그 모든 시간이 그에겐 귀한 보물이다. “진리를 깨닫게 해준 곳,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사랑이 되는 곳, 나 같은 사람도 쓸모가 있어 나를 필요로 하는 곳, 그래서 나를 행복하게 하는 아이티 꽃동네”에서 그는 오늘도 감사한 하루를 꾸려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