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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FIH 문화생활
지구촌을 밝히는 ‘한국인 슈바이처’

우간다 의사들의 스승
유덕종 교수를 만나다

23년 동안 동아프리카 우간다에서 수천 명의 제자를 길러내며 ‘우간다 의사들의 스승’이 된 한국인 교수가 있다. 1992년 코이카(KOICA, 한국국제협력단)의 1기 정부파견의사로 우간다에 파견돼 마케레레대 의대 명예교수로 있으면서 국립후송병원인 물라고 병원에서 수많은 에이즈 환자와 결핵·열대병 환자들을 진료해온 유덕종 교수. 인생의 절반을 아프리카와 함께해온 그의 뜨거운 이야기가 여기에 있다.

글_ 김보미

1992년, 오랜 꿈을 위해 우간다로 떠나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대한민국이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원조를 하는 나라로 도약하던 1991년의 어느 날. 경북 안동시 안동병원의 한 청년 의사는 그해 창설된 코이카의 아프리카 정부파견의사 1기 모집 공고를 보게 된다. 유덕종, 그에게 10대 시절부터 막연하게 간직해왔던 꿈이 현실로 다가오는 순간이었다.
“고등학생 시절, 인생이 너무 허무하다고 생각했어요. 한 번뿐인 인생이니 무엇인가 의미 있는 인생을 살고 싶었고, 그래서 아프리카에서 의사로 일하는 것이 의미 있겠다고 생각할 때였죠.”
아무리 오랜 꿈이라지만, 꿈을 위해 꾸준한 노력의 결실로 얻은 안정적인 생활을 포기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더군다나 그가 떠날 곳은 1990년대 초반엔 세계 최고의 에이즈 유병률로 널리 알려진 우간다였다. 아들이 고생길이 훤한 아프리카로 떠난다고 하니 아버님도 처음엔 매우 힘들어하셨다고 한다. “몇 년이 지난 후엔 오히려 자랑스러워하셨지만요.”
그렇게 1992년 6월 마침내 유덕종 교수는 긴 비행 끝에 우간다에 도착했다. “우간다에 뼈를 묻겠다는 마음이었어요. 과거 자신의 고국을 떠나 어려운 한국을 위해 헌신했던 서구 의료선교사들에게 빚진 마음이 있었거든요.”
하지만 생각했던 것보다도 우간다의 상황은 훨씬 열악했다. 1986년 현 정권이 집권했지만 1992년 당시까지도 치안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밤마다 총소리가 들려왔고, 거리의 상점엔 물건이 없어 물건이 들어왔다는 소문만 돌면 사람들이 몰려들어 줄을 설 정도였다.

위기를 극복하고 새로운 비전을 품다

무엇보다도 심각했던 것은 보건의료 상황. 그가 일했던 물라고 병원은 우간다 최종 후송병원임에도 기본적인 항생제와 인슐린조차 없을 때 가 많아 병원 내 사망률이 무척 높았다. 특히 에이즈 환자 수는 압도적이었다. 물라고 병원 입원 환자의 70% 이상이 에이즈 환자였고, 분만을 위해 입원한 산모들에게 HIV(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 검사를 한결과 34%가 양성이었을 정도. 열악한 병원 상황은 의사로서 그를 무력하게 만들었다.
“한국이었다면 충분히 살릴 수 있는 환자들이 죽어가는 상황을 마주하는 것이 무척 힘들었어요. 처음엔 하루에도 수십 번씩 돌아오고 싶었죠.” 1995년경엔 쌓인 스트레스로 포기하려고 했던 적도 있다. “제가 그곳에서 정말 도움이 되고 있는지 회의가 들었어요. 그 좌절감 때문에 의사로서의 나는 죽었다고 생각하고 의대생 교육에만 매진하기도 했었죠.”
하지만 그때마다 성경을 읽으면서 자신을 그 자리에 있게 한 감동적인 사랑을 떠올리며 스스로를 일으켜 세웠다. 늘 곁을 지켜주었던 가족도 유 교수에겐 큰 힘이었다. 그가 우간다로 먼저 떠날 때 셋째 아이를 임신 중이라 함께 길을 나서지는 못했지만, 결혼 전부터 아프리카 의료 봉사에 대한 열망을 알고 있었던 부인은 언제나 그의 꿈에 대한 지지를 아끼지 않았다고. 우간다에서 그런 가족을 잃을 뻔했던 경험은 그에게 가장 힘들었던 기억으로 남아 있다.
“첫째 딸이 뇌수막염으로 사경을 헤맨 적이 있어요. 경련을 하고 호흡이 나빠졌는데 물라고 병원에서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어 집에서 치료했죠. 침실이 중환자실이 되어 아이가 경련할 때마다 직접 항경련제를 주사해야 했습니다. 특히 정전된 날은 모기장 안에 촛불을 켜놓고 돌봤지요.” 다행히 기적적으로 딸은 살아났고, 유 교수는 우간다 현지에제대로 치료받을 수 있는 병원을 만들겠다는 새로운 꿈을 꾸게 된다.

가르치기 대신 이해하기, 그렇게 친구가 되다

우간다에서 23년. 유 교수는 길을 걷다가 아이들이 “무중구(외국인이라는 뜻)”라고 지칭할 때에야 비로소 ‘아, 내가 외국인이구나’ 하고 생각할 정도로 그들에게 푹 빠져 있었다. 인종도, 문화도 다른 사람들 속으로 그는 어떻게 스며들 수 있었을까. “처음엔 그들을 가르치려고 했죠. 그런데 조금씩 철이 들어 그들을 이해하는 것이 선행돼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그들과 친구가 됐을 때 피부색이나 이질적인 문화는 전혀 문제가 되지않았다. 그런 마음으로 마케레레대 의대에서 가르친 수천 명의 제자 중에서도 오모딩은 가장 기억에 남는다. 유 교수를 존경해 그와 같은 내과의를 꿈꾸던 오모딩은 미국 워싱턴대학에 유학한 후 돌아와 현재 우간다에서 가장 능력 있는 종양학 의사가 됐다고.
수많은 환자 중에서는 ‘레네’라는 환자가 기억에 남는다. 우간다 남서부의 카세세라는 곳에서 특이한 진균에 감염돼 위중한 상태로 물라고 병원에 후송돼왔던 그에게 유 교수는 기관지경 검사를 통해 병을 확진한 후 비싼 치료약을 사주었다. 다행히 완치돼 그의 가족들이 무척 감사해했고, 우간다를 떠나올 때까지 계속 연락을 주고받았다고 한다.
2016년, 23년 동안 정들었던 우간다를 떠난 그는 현재 에티오피아에서 코이카 글로벌협력의사로서 의료 봉사와 현지 의사 양성에 힘쓰고 있다. 유통구조가 열려 있어 돈만 있으면 의약품이나 장비들을 구할 수 있는 우간다와 달리 에티오피아는 규제가 심해 의료장비와 의약품구입이 무척 어렵다고 한다. 꼭 필요한 의약품인데도 에티오피아에 없는 것이 많고, 수입되는 의약품은 가격이 너무 비싸 일반 환자들이 살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에 대해 “현장을 모르면서 정책을 결정하는 관료들이 어디에서나 문제가 된다”고 일침을 놓는 유 교수. 그럼에도, 아니 그래서 그는 여 전히 아프리카에서 의료인으로서 더 큰 역할을 하고자 하는 꿈을 키우고 있다. 가난한 사람들이 좀 더 쉽게 의료 서비스를 누릴 수 있도록 2002년 우간다 캄팔라에 설립한 베데스다 클리닉을 열대병연구소, 의과대학으로까지 키워내 현지인들의 아픔을 치유하고 진정한 사랑을 나눌 수 있는 공간으로 완성하는 것. 그것이 그의 현재진행형 꿈이다.
만약 서른셋의 나이로 돌아가도 같은 선택을 할까? 그의 대답은 너무나도 확실한 “Yes!”다. 왜일까. “이 길이 제가 가야 할 길이라는 확신이있기 때문입니다.” 흔들림 없이 선명한 꿈을 따라간 아프리카에서 자신을 마음껏 성장시키는 행복을 누리며 인생의 황금기를 보낼 수 있었다는 그에게서 행복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배울 수 있었다.